조선 초기, 문신으로 명성을 날린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는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조에 이르기까지 이조판서·사헌부대사헌·홍문관 대제학 등의 요직을 두루거친 인물이다. 문신임에도 일찍이 국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그의 주장은 양헌수 대를 전후해서 여러 후손들이 절도사를 역임함으로써 더욱 돋보였으며 양헌수의 증조부인 양세현(梁世絢)은 황해도병마절도사(종2품)를, 조부 양완(梁垸)은 경상좌도수군절도사(정3품)를 지냈으며 『악기도설』이라는 진법서를 남겼다. 부친 양종임(梁鍾任)은 음직으로 무관직인 부사정을 역임하였으며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양헌수(梁憲洙) 승전비(勝戰碑)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 1995.3.1.지정)
양헌수 승전비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있다. 가로 39㎝, 세로 21㎝, 높이 140㎝로 단층 1칸의 비각에 안치되어 있다. 비석의 후면에는 승전 기록이 음각되어 있다. 1972년 7월 3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고 1974년 비각의 단청을 보수하였다.프랑스는 1866년(고종 3) 10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로마가톨릭교회)탄압을 구실삼아 극동함대 소속 군함 7척으로 조선을 침입하였는데(병인양요), 당시 순무천총이었던 양헌수가 삼랑성(정족산성)에 강계(江界) 포수 500여 명을 매복시켰다가 야간에 기습공격하여 피에르 G.로즈(Pierre Gustave Roze)가 이끄는 160명의 해병을 무찔렀다.10월 3일 쳐들어왔던 프랑스군은 사망 6명, 부상 30여 명의 손실을 입고 10일후에 간신히 갑곶으로 패주하였다. 이에 강화군민들이 비를 세워 그의 공적을 기리고자 하였다. 양헌수 장군의 자는 경보, 본관은 남원으로 현종 4년(1838)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가 병인양요시 공을 세워 한성부좌윤으로 특진되었으며 이후 부총관, 금위등 중군을 거쳐 형조판서, 금위대장등을 역임하였다.